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아힘 파이퍼 (문단 편집) === 전후 재판 === || [[파일:파이퍼 머그샷.jpg|width=100%]] || || 요아힘 파이퍼의 머그샷 || || [[파일:external/d1ceaeed7b1d67735a88294771ea6a1ab9400be6c3b11d0e85d8500839098604.jpg|width=100%]] || || 군사재판에 출두한 파이퍼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다른 무장SS 병사들과 함께 [[말메디 학살]] 재판(Malmedy massacre trial)에 기소되었다. 여러 증언에 의해 파이퍼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적어도 두 번 내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벨기에]]의 민간인들을 사살한 혐의에 대해서 파이퍼는 그들이 [[빨치산|파르티잔]]이었다고 답했다. 당시 파이퍼와 부하들은 가족을 [[소련]]측에 넘겨 버리겠다는 협박과 구타를 당했는데, 이에 파이퍼는 부하들만 방면해 준다면 자신은 모든 죄를 자백하겠다고 밝혔지만 거부당했다. 미군 제30 보병사단 119연대 소속 대대장 해롤드 D. 맥코운 소령은 재판에서 사건 당시 파이퍼가 오히려 부상당한 미군을 위해 위생병을 남겨 놓았다고 진술하는 등 파이퍼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의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고, 파이퍼의 부하들은 유죄 선고와 더불어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파이퍼 역시 감독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교수형 판결을 받았다. 파이퍼는 부하들을 고통스러운 교수형 대신 총살형에 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기각당했고, 옥중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와중 다수의 자백이 [[가혹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말메디 학살]] 사건 관련 피고자 다수에게 선고된 사형은 장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